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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면뒤척거릴 틈 없어돌아눕지 못하는 달빛거들먹거리기엔 비좁다별들이야 다를 수 있지만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이유머릿속에 앉아 있는 생각목차에서 찾아야만 했던 해법생각에만 머물고옴짝달싹 못하는 날내 것 만들기 위하여스스로 물어보던 바람읽고 들어도 채워지지 않아하라는 대로 하고되짚어 흔들어 보아도설렘은 낮은 곳으로 오지 못하고뒤척이는 오후
독자시
노용춘
2023.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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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틈 사이사이로소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집산 중턱에 나란히 입을 모으고돌들이 앉아 있다오르는 길에 마음 담아 두 손 모으고내려가는 길에 사랑 담아서햇살과 바람이 소원을 키운다이끼 낀 지붕 위로목 쉰 바람이 쉬어 간다계절이 건너가는 무릎 사이로수북하게 자란 소원들이발효되고 있다
독자시
양현
20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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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면 혹은 눈이 그친 후면한 손에 장거리를 든 노인이 담배를 피워 문다그의 몸을 빠져나가는 흰 연기들이 잠시 그의 눈에 머물다 흩날린다흔들리는 것들은 날개가 없어도 먼 곳의 눈물을 데려온다술을 못 마시는 나는 막걸리 한 잔입 얼얼한 고추파전을 시켜놓고길 건너 신발상점의 지붕에 앉은 까마귀를 바라본다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노인은 떠나가고새털보다 가벼운 흰 눈송이가 까악 까악 날아오른다내겐 취하지 않은 날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검은 울음 한 방울이 툭 몸에 번져온다
독자시
권택삼
202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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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를 지우고 줄바꿈으로 교정하는출근길 눈인사놓쳤던 생각을 챙겨들고닷새간의 공간이 묶여 있는 매듭 속으로넣음표를 친다분주하고 예민하게 밀고 당기며헐거워진 문장을좀 더 단단하게 조이면시작점은 늘 버겁지만,따옴표 속으로 들어가는 발걸음들이앙큼 상큼하다이쪽에는 부재한 저쪽으로 향하는 속도월요일의 문장부호접혀있는 것들을 펼친다 다시, 월요일
독자시
김영희
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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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어머니 손잡고종종걸음으로 따라가던 대목장골목엔 사람들도 참 많았지만옷장수도 신발장수도 많아서옷도 입어보고 신도 신어보고 싶었는데어머니는 몇 번이고옷가지며 신발을 들었다 놓으시며나를 자꾸 쳐다보셨다돌아올 땐 소금에 전 고등어 한 손과할머니 내복 한 벌을 사가지고 왔지만,오늘은 이곳에 설 대목장이 섰다어릴 적에 보았던 옷장수도 신발장수도 모두이곳으로 와서 옷과 신발을 팔고파도소리를 몰고 다니는 고등어 장수도절은 고등어 앞에 앉아있다지금 어머니는 안 계시지만 아마도옷가지며 신발을 한 아름 사 주시며추운 날 떨지 말라
독자시
김선영
20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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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조각 퍼즐 맞춰 소곤소곤 한 땀 한 땀감침질로 정성 담아 색색이 조각 잇기전통적생활의 지혜밥상지교 빛난다.짜투리 천 알뜰한 정 알록달록 무늬 엮어허물과 서로 잘못 이해하고 덮어주듯한쪽 귀끈을 달아서고이 감싸 묶어준다.
독자시
김기옥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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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뭐냐고 묻길래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거라 답했습니다심미주의자입니까? 다시 물었습니다눈빛만 바라보았지요반문하고 싶었습니다아름다움에 무슨 주의가 필요합니까?겨울비는 사선으로 내리는데비의 촉감은 한 옥타브 올라가는데비를 맞고 있는 당신은쓸쓸한 당신은 그러므로 눈부시다고속삭였지요고독한 당신이 바로 예술입니다
독자시
김종수
202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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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밥 한 번 먹자는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약속을 반죽한다약속을 밥 먹듯이 하지 않을 때반죽은 사람을 닮아간다다음이란 기약은 버팅기고 있는 밀가루 점성의 힘이지만미루고 미룬 날의 배후에는여러번 문이 잠긴 약속이 있다불어터진 관계 속에는아득한 별자리가 들어있고힘을 푼 누군가의 배려도 들어있다어떤 사람들은 국수 한 그릇에단단히 걸어둔 마음을 열기도 하고우두커니 서 있던 어떤 쓸쓸한 날을 불러오기도 한다정말 그 곳에 우린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까누군가는 그 기대 때문에면발을 잇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정다운 약속에 기대면내일을 나눠먹는
독자시
김정미
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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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에서내일을 품느라창백한 듯,우울한 듯묵묵히 내린 뿌리그 뿌리는영으로 줄기를 만들고영으로 빛을 내어영으로 꽃을 열었다.그 뿌리는질척한 어둠에서도흠 없는 빛을 꿈꾸며허깨비처럼 춤추던무대를 접었다.사경을 헤매던 그 뿌리초록 기둥에 꽃을 열고큰 산을 담는다.
독자시
김민정
20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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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시골길 걸어가면아랫말 삼거리 모퉁이간판도 없이 삼거리집이라 불리던 낮은 지붕 구멍가게불 꺼진 격자 유리문 두드리면세 평 남짓 쪽마루가 전부인 가게에 백열등이 켜지고드르륵 미닫이문 열고 나오는부스스한 얼굴 김 노인나무 선반에서 꺼내 주는 통조림엄마는 복숭아 통조림을 ‘넥타’라고 불렀지둥근 밥상에 둘러앉은 다섯 식구숟가락으로 떠먹던 황도 복숭아귀퉁이 한쪽씩 베어 물고 해맑게 웃던 표정들복숭아 통조림 하나로 온 가족이 행복했던 시간도복숭아 국물이 달다고 국물만 떠먹던 엄마도김 노인도, 구멍가게도 이제는 없고봉인된 기억의 꼭지딸
독자시
강신월
202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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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오는 바람이었다.골마다 불어대는 바람이었다.굳은살 박인 심장이 왈랑왈랑 두근거리고,옷자락이 다리를 휘휘 휘감는 감촉이 좋았다.폭풍을 몰고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휘몰아치는,소나기 쏟아지기 직전의 미친바람이 좋았다.블랙홀에 빠지고, 토끼 굴에 빠지면서도,그렇게 불어대는 바람이 좋아그래서 그렇게 바람이 났다.
독자시
정치산
20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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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려간 구름 한 필을 감쪽같이 베어다가그 속에 치뜨는 세월을 꽃물처럼 달였네다시금 바라본 자리 햇살 고운 이승이다.
독자시
정정용
2023.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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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정전된긴 기다림은너의 온 몸을 빌린점화를 시작으로내가 타는 중이다오로지 하나의 사랑으로만사무치는 정직한 심지저렇듯 외진 상처를고스란히 쓸어 안는빛의 궤적내가 타고 나서야비로소텅 빈 중심 안에 숨겨졌던너의 뜨거운 눈물을 본다눈 먼 채 배회하던 어둠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닌 것이다
독자시
이연희
20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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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에 비가 내린다어느 한 부분을 잃어버린 것처럼너를 보내고 길목마다창에 어리는 모습 간절하다버스 창밖 어미의 그 손사래 속에지나온 길들이 울컥 쏟아진다네가 발랄하게 흔드는 손이오늘 따라 가슴을 훑는다지나온 저 편 기억만이차창에 빗물처럼 흘러 내린다나를 부르는 것 같아 뒤돌아보면버스는 그렁그렁 빗방울 매달고대관령을 넘어 간다길게 늘어 난 길을 따라 간다이젠 아무것도 그립지 않다고 끼워 넣는그 공백에 네가 살고 있구나힘껏 밀어주지 못한 마음으로 너를 보내고비가 오는 터미널에서내가 시집오던 날 만큼 울었다.
독자시
정정하
20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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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아이야네 모습 그대로 시가 되어서바람도 멈추고가만히 너를 읽는다
독자시
김향숙
202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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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을 뒤집어 쓴 초록이 동안거에 들어갔다앉은 자리 돌탑 되어 물음표를 묻으니고요가 흰 산에 가득하다오롯이 혼자여서 좋은 날풍경에 동여 맨 바람 소리가 보인다차가운 햇살이 있던 이 자리가 꽃터였을까탑 위에 핀 흰 꽃이 부풀어 오른다
독자시
이정화
202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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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아픔 속에 시간은 속절없고 가물대는 기억 속에 향기마저 잊힐까 헤어짐 그리움으로 빗물 되어 흐르는데
독자시
김여진
202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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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발발이과에 속한 굴뚝새12층 난간에서 한참을 울다 날아간다꼭, 근처 어딘가에 굴뚝이 있을 것 같다아랫목이 흐릿해질 때쯤아궁이 가득 군불을 받아내던저녁나절의 굴뚝이 있을 것만 같다열몇 살 때부터 지금까지오래 잊고 또 깜짝 잊고 있던 새그사이 굴뚝들은 멸종되어가고 있다굴뚝이 사라지자 나무들은 안심했겠지만으슬으슬한 몸의 곳곳에는군불과 아랫목이 싸늘해졌다그러니까, 나무들아파트 내 공원까지 내려왔던 이유를 알 것 같다소여물을 맹렬하게 끓이던 굴뚝빈 솥에 맹물만 끓이던 군불열 식구 저녁밥을 끓여내고가난한 집이면 가끔 쉬기도 했던 굴뚝그
독자시
이서화
20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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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천년 죽어천년 주목사이빈손되어 떠나는 넋恨 달래는 징소리 가슴 짠하다숫제 두발을 허공에 뜬 절정에 이른 무녀간드러진 춤사위 속 울림이 저리도 간절할까얼음꽃 하얗게 핀 태백산
독자시
정경헌
20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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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엔시인인 그녀가함박눈송이가 되어소릇이 내게로 와 준다면눈발 사이로 강아지처럼 뛰쳐나가눈 위에 뒹굴며 그녀를 맞으리라화르르 화르르 꽃바구니 같은 수다로저녁상을 차리고밤이 이슥토록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생의 끝까지 함께 걸어간다면참, 좋겠다
독자시
전영순
2023.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