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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지나는 길모퉁이마다오죽잎 흔들리는 소리가촘촘히 젖어 들었다붉은 잎으로 떨어지는 대관령 산 그림자너의 숨결에 젖어 물비늘처럼 환하다제 몸의 무게 벽화처럼 견디며새벽을 여는 여문 향기는 항로가 되어무영등처럼 달로 뜨고우주를 노래하던 붉은 해는낯선 길을 걸어와 온 힘으로 세상을 품었다가낮은 걸음으로 꽃잔치 열었다‘단풍 들었다’시인은 다만 시로 쓴다
독자시
김경미
2021.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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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아기를 안았다아기는 근심이라는데천둥번개 나를 빗겨갔으면 좋겠다곁을 돌아보니 동체라는 남편이 있다내가 던지려는 아기 꿈을 받아 안으려는지나를 향해 돌아눕는 그 사람 품우주라도 받아 안을 듯이 넉넉하다
독자시
이용희
2021.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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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월급쟁이가 산골에 집을 짓고자급농이니 자족농이니 하며갖은 푸성귀를 심어 먹는 일은대대로 농사꾼인 이웃들에게는밉상스런 일임이 분명할 것이다 게다가부지깽이도 거든다는 바쁜 농사철에 눈치도 없이덩치 큰 개에 이끌려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일은유모차를 밀고서야 논을 물고 엎드린 노인들에겐더더욱 이쁜 모양이 아닐 것이다그렇다고 풀을 키울 수만도 없어서콩은 튀고 깨가 쏟아진다는 말을 비닐멍석에 앉히고베어 뉘였던 들깨를 걷어 타작을 해 보는데이 모두 도리깨질을 당하고서야 얻는 소득이라는전혀 새로운 깨달음이 촤르르 촤르르 쏟아지는 것이다얼마
독자시
권혁소
202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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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어디에고 떠다니기 좋다붉은 잎사귀미묘한 곡선 긁으며고요를 가르는 틈새로지난 시간들에게 말을 건네니외롭진 않지만 쓸쓸하고신나진 않지만 뿌듯하고무겁진 않지만 침잠해지고예쁘진 않지만 아름답다작은 용서로 큰 강물 흐르고따뜻한 눈빛 한 줄기가을 햇살로 익어 내리는 고요 곁에가만히 앉는다아름다운 삶을 생각하기에 너무 아름다운 계절유독가을에 더 떠다니는 이유다 지영희
독자시
지영희
2021.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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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찐 버들개지너럭바위 감아 도는 급물살에햇살로 부서지고시냇물 숨 가쁘게 달려와검은 소에 잠시 머무를 때눈발떼기 수면 위로 모여들고 흩어진다뽀얀 국수나무 숲 헤치고 들어가면이끼 푸른 진퍼리를 점령한울긋불긋 무당개구리가까이 오지 말라 경고하고속새 밭 가장자리 바위 위에벌집 뒤집다 쫒겨온 노오란 담비가가려운 낯짝을 긁어대고 있다가파른 산길 벼랑 끝인고의 세월 견디어 낸거북등 같은 소나무 사이로운무가 하얗게 하얗게 피어나고 있는 곳박인균
독자시
박인균
202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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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라고 부르는 끝에깊은 우물이 고였습니다투명한 청잣빛 하늘이 빠지고잔비늘 같은 구름이서쪽으로 흘러갑니다구름을 살짝 건져 올립니다손가락 사이로 주르르 가을이 흘러내립니다“가을”하고 부르는 끝에낙엽이 날려갑니다내 생을 다 바쳐 써내려간부치지 못한 편지가 발에 밟힙니다바람이 서걱거리며 읽다가어느 후미진 골짝에흙과 살 섞으며 누운 편지의 봉분을 봅니다“가을”하고 부르는 끝에코스모스가 흔들립니다동생이 긴 목을 흔드는 풍선을 들고 있습니다바람에 풍선을 놓친 다섯 살 동생이누런 벌판을 질질 끌고풍선을 잡으려 높이 올라가다별의 자궁 속에
독자시
공계열
202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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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만 해도 효도인 세상풀 댕강 쳐내고당당걸음 내려오는 길문득,못 다 뽑고묻은그 대못 생각
독자시
한상호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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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끝에파란사과바람에 흔들립니다청설모 한 쌍이뛰어 볼까 올라갈까며칠째맴돈 사이사과는 사과는겁에 질려서빨갛게 빨갛게물들고 있습니다정민시
독자시
정민시
2021.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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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루에 강아지들처럼 모여 앉고아버지는 신문을 큰 소리로 읽으셨다눈 감으면 떠오르는 선명한 기억들그 기억 지붕 위로 비가 내린다엄마는 언제나 동굴 같은 부엌에서앞치마에 재를 묻히시고아궁이 앞에서 홀로 삼킨 가난의 설움을따끔거리는 검불의 촉감 같이나를 아프게 찌른다나뭇가지 같은 엄마의 손이내 뽀얀 다리를 쓰다듬던 저문 기억들가을 하늘처럼 시리다여우꼬리처럼 짧은 가을 햇살이내 등에 업힌 채 잠이 들고 나면어느 새 어둠이 내려앉던 언덕 위 우리집그 길 위로 뽀얀 달빛이 내려와 논다양 현
독자시
양 현
2021.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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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지나 않으면 생각나지도 않지달지나 않으면 기다리지도 않지노랗게 익은 살구 한 알입에 물리고 싶어눈이 짓물러가는 하루해는 정수리를 지나 시들어가는데새끼들은 올 조짐이 없어늙은 살구나무뚝!뚝!눈물 떨구는 사북
독자시
장은숙
202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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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모여 피어야 아름다운 것메밀꽃이 꼭 그렇다그것도 밭으로 하나 가득 피면누구나 그림 그리고 싶은 커다란 캔버스그 사잇길로 두 손 들어 올리며활짝 웃던 그 소녀 누구던가오래 된 사진첩에서스무 살 시절의 모습을 보았다메밀꽃은 안개처럼 피어있고노오란 원피스의 긴 머리 소녀가날아갈 듯 서서 먼 하늘을 보며영화의 한 장면을 찍는 듯 했다나 다시 스무 살로 돌아 갈 수 없지만해마다 메밀꽃밭 그 자리에 서면하얀 마음으로 안기고 싶은어머니 품속 같이 너른 메밀꽃밭
독자시
송마리아
2021.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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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옷소매가어정어정 내려와메마른 계절의 숨결이넘겨지는 거리밤길 걸으며길어진 그림자는저마다 드러누워땅거울로 깊숙이 들고만월의 무수한 소원들은달빛을 머금고멀어져 간 두 손의 독백새순의 시간에엉키고 도드라진 상처를붉어진 나무의 입술에 대어도무엇 한 겹덧대기에 어색한눈 끝으로 활자가서서히 일어서는9월의 하늘창무 밖 고요의 단상으로그대 목소리 올려두면사랑스러운 적요가무럭무럭 펴 오르는낙하 잎이 뭉근한 계절
독자시
김정현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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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메밀꽃 눈을 보았다이효석문학관 앞 물레방아 지나서생가 울타리 넘어 구름집 같은평양집 언덕에 흐드러진 메밀밭을 걷다가가슴이 하얀 꽃불로 타오를 때나를 바라보는 꽃눈메밀꽃 속눈 속에는달빛 길을 걷는 세 남자와절렁거리는 나귀 방울 소리와새악시의 슬픈 눈물이 어리고둥근 안경테의 젊은 신사가 서 있다허생원 조선달 동이친근한 장돌뱅이 이야기 소리히힝거림도 없이 발바닥 장단 맞추는 나귀성처녀 한숨 속에 팔려 가는속사정이 달빛 따가 메밀꽃에 스며들고가산 선생 고향이 그리워 단편을 쓴다메밀꽃 눈속 사연은 현재다과거에서 못 이룬 사랑현재라는
독자시
강선녀
2021.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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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감이 푸르고 가지런하다겉은 무표정인데 이랑마다 속내를 재고 잰다안으로 휘어드는 노란 고백들,이랑이 고랑으로 휘는 열병, 백약이 무효다곡선이 앓고 있다
독자시
엄인옥
202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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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뜨거웠던 계절의 끝며칠 동안 그 여름의 뒷덜미 차게 식히던 비가 그치고나른히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에 오늘 사람들은하나 둘 겉옷을 벗는다갑작스레 색을 바꾸는 나뭇잎들 격정의 끝에서거리에 온통 노란 잎 흩뿌리면거리의 연인들 속삭이듯 떠들며 지나가고옆을 스쳐 간 블라우스가 유독 새빨간 여자를곁눈질 하다가 문득 대책 없이 간지럽다머리 속이 텅 비는 것처럼유혹하는 오후의 햇볕에 맹렬히 쏟아내는은행나무의 수컷내음에 머리속의 잎들이 일제히웅성댄다
독자시
홍문기
2021.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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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 속에 쇳물처럼 솟구치는 날개가 있다천번의 담금질에 쇳덩이 속에서 날개가 돋는다팔만사천번의 메질, 울음의 두께로 날개를 편다오래도록, 응어리진 울음을 풀어주고 흩어진 울음을 모아 주던손은 천개의, 귀 없는 바람이다법당 문 꽃살무늬 고요 속으로 속세의 상처들이 돌아와 엎드리는 밤산사 지붕 아래 둥지 튼 새 한 마리한 점 바람에불의 날개로운다
독자시
이봉주
20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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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입석대 지나 서북쪽차디찬 암벽에 들어앉아결가부좌한 사내오랜 세월 귀 하나만 열어놓고묵언 수행 중이다비바람 속에서도 한결같이연화대좌에 꼿꼿이 앉아속세의 고뇌 어루만지며먹먹했던 시간어느새 천년이 흘렀던가누군가는 복을 빌다 가고누군가는 회한에 잠겨 울다 가고또 누군가는 생의 짐 부려놓고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갔다앉아서도 천 리 내다보고눈 감고도 만 리 밖 소문을 읽어내는무욕의 사내, 문득견고한 침묵을 깬다이보시게, 나그네힘들거든 좀 쉬었다 가게어차피 다시 내려와야 할 길서두르지 마시게나!*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독자시
최영옥
202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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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 소꿉놀이가 재미없어지면가볍게 털고 집으로 달려가 엄마~불렀다그 어린 날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데아직 난 사는 일이 소꿉놀이 같다그래서 가끔 지치고 시들해지면툴툴 털고 일어서야지 한다어스름 저녁이 오면지치지 않아도, 시들해지지 않아도공연히 울먹이며 달려가던 품속어디서 찾을 수 있나어디서 만날 수 있나배꼽 속에 문이 있을까?세상 밖 우주 공산으로 밀어내고빗장 닫았던 배꼽그 문 열고 들어가면 길이 열려 있을까?하루 같은 내 삶에도 어스름이 찾아드는데문혜영
독자시
문혜영
20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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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관 사층수술대 위의 언어들형용사가 수술을 받는다동사도 아픈 지 말을 더듬고돼지 꼬리에 시퍼렇게 멍든 비문들형태만 그럴싸하게 맥을 이어가는데저 건너 봉의산의 노송들은단풍 물든 책갈피를 펼쳐 보이며소설을 쓰고 있다첨탑은 산꼭대기보다 더 높이 올라축 늘어진 전선들을 깨우고졸음을 털어낸 문장들을번개나 천둥 속에서 불러오는데시름시름 앓던 문장들이마취에서 깨어나수술대 위에서벌건 햇덩이를 품는다
독자시
최성희
2021.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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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열두 길 물속 같은 생각의 굴그 굴속을 여우비가 엿보았다바닥이 훤히 읽히는 네 동굴 그 입구에 선 나는장마 같은 헛웃음을 기침처럼 했다숙제하듯 풋사과를 베어 문 입처럼입속의 촉수들은 온통 내 안의 물방울을 뽑아 올리고생각의 둑은 무너져 혼돈의 뻘이 되는데굴속에서 검붉게 타오르는 심장의 불기둥마술사의 마술 봉으로 찰나를 높이 치켜들고여름날 천둥번개로불기둥 덮고 가슴 쓸어내린다자갈밭에 쪼그리고 앉아 비바람 맞는 어미 잃은 새끼 새처럼나 떨고 있다
독자시
송경애
2021.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