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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대로 저문 가을을 지나면서차창 밖으로 아름드리 느티나무 보이는산 아래 마을에 눈길 오래 머무는데기다렸다는 듯 화르르 붉은 나뭇잎들 떨어지고때 이른 눈이라도 내릴 듯 낮아지는 하늘저녁연기 오르는 집 근처에당신이 나와 있을까 두리번거리며바람결에 몰려오는 밥 냄새에스며드는 설움을 떨쳐내느라 해 지는줄 모르고이번엔 집 채만한 그리움만 담아간다고편지를 쓰는 속절없는 가을저녁
독자시
채재순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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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부부 방앗간 쥐똥나무 울타리에 파도처럼 너울처럼내렸다 날았다 종일 먹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참새들아내가 동네 사람들에게 신신당부하고자 하는 것은무슨 일이 있어도 부부 방앗간이 문을 닫아서는 안되므로명절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떡을 주문하고 기름도 짜야하고생일 떡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시
이상국
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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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숲에 아름다운 길이 보였습니다그 길로 끌리어 들어갔습니다길섶은 축축한 갈색 낙엽이 밟히었습니다수령이 오래된 아름드리 나무들이가지를 늘어뜨리고,싱그런 초록의 들판엔 살진 까치와 청설모들이개들도 주인과 같이 산책하는 평화로운 정경들숲속은 조용하였습니다날씨가 흐려서인지 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아름드리나무에 기대어그의 숨결에 나의 숨결을 보태어 보았습니다안온했습니다모든걸 다 받아주는 넉넉함이나를 꼬옥 품어주는 듯 했습니다나뭇잎들 속살거림새들 지저귐 속에소우주 안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그의 몸을 껴안아 보려했으나겨우 삼분의 일밖에,그런
독자시
김령숙
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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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네 생각이 날 때가 있다.그럴 때면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보지 못하지만마주하고 있음을 느낀다.털썩갑자기 발걸음을 멈춘다.
독자시
한상훈
202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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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하나오늘도 하나새주둥이에 집힌나뭇가지로 집을 짓고아까도 하나지금도 하나헌 깃털을 털어옷매무새를 바꾸면,허물 벗는 오늘알을 깨는 지금새 집을 짓고새 단장을 하고파란 둥지 햇살푸른 발돋음으로앎으로 영글어가는통로를 걷는다.
독자시
한효실
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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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가지마다홍시가 주렁주렁울 엄마 좋아하는노오란 과일이다.한 입 쏙입안이 텁텁이런 것을 왜 먹어,감 따다 혼이 나고감보면 할배 생각잘 익은 홍시 몇 개까치밥 남겨주고상점의노란 감 보면성난 얼굴 떠올라.
독자시
이형식
202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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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의 볼품없는 들풀까지 연민을 느끼는백발이 허공을 난다가을이 중턱에 와 있으니백발이 열기를 뿜는다.재잘대는 새들의 날갯짓 허공에서 시든다.하얀 하늘이 저만치 물러가고몸 시린 나뭇잎 뒤척인다.물기 마른 푸르름이 움츠려들 듯노화된 나의 몸은 한주먹 크기로오그라드는 자연의 걸작품---신이 주셨다는시를 읽는다. 시를 쓴다.
독자시
박정완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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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이가 묵직한 검은 전화기 선에서하얀 그물이 쏟아진다거미줄처럼 맑고 투명해서거미줄처럼 맑고 투명한 말言들이 쉽게 그물을 통과한다그물에 걸리지 않는 말들은빠른 속도로 너에게 달려간다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맞으며 걷기도 하고이불속에서 핸드폰을 들고 속삭이기도 하고침묵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순간의 사진을 전송하기도 한다꽃다발처럼오랜 시간을 우려낸 詩처럼전송된 말들은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터질 것 같아도그물은 그물이어서 잠잠하게 그 말들을 놓아 준다간혹, 나비의 날개 같은 말 하나그물에 걸려 허둥거리기도 한다너의 잘못이 아니다나의 잘못도
독자시
송연숙
202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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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변위가 아닌 거리성과가 없더라도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했다면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인생은 일률(J/s)이 아닌 일(J)효율성도 중요하지만 시간에 쫓기지 않고순간순간 의미 있게 사는 것순간 느꼈던 안 좋았던 하루도긴 세월 지나 생각하면 꼭 필요했던 하루불량이 아닌가 생각하며 집어 든 까만 퍼즐 조각도완성되어 가는 작품 속에 맞춰보니 예쁜 눈망울이었네그렇게 삶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가득 채울 때관성(m)은 더욱 커져 사랑의 힘(F)은 점점 커지고인생의 가속도(a)는 점점 늦춰진다.
독자시
김민식
202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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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에 혼자 서 있는 민들레오늘도 우산이 없다이른 봄언 땅을 들추고 싹을 틔우고보도블럭 틈에서 짓밟히면서도꼿꼿이 허리를 세우고기어이 꽃을 피웠다꾀꼬리의 노란 날갯짓을 따라비누방울처럼 홀씨를 날리면밭두렁 냉이와 꽃다지는고개를 하늘로 젖히고 팔을 흔들었다서리꽃 반짝이는 가을 날낙엽이불 속에 숨어 안간힘을 썼다발끝에 힘을 주고 머리 위로 밀어 올렸다마지막 한 송이를쇠기러기 그믐달을 쪼아 먹는겨울의 문턱에서
독자시
이은숙
20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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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결실보다더 많은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빈 들은 뒤적이던 철새들도겨울 바람을 앞질러 길을 잡으면억새풀처럼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빈 손에가장 어린 별의 눈물을 받아물결 잠든 어느 해안선에도 햇살이 닿기 전마지막 촛불을 들고이별을 기다리는 목숨들 앞에 무릎을 꿇고차례차례 발을 씻겨야 한다.
독자시
정진윤
202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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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 장독대에서 어딘지 낯익은 항아리 하나가만히 들여다보니 자글자글한 실금에서나비가 날개를 접었다 편다첫 객짓밥을 뜨게 한 오지항아리다포기들을 던져 넣어야할 만큼 속 깊은,언 김치들에게 계절을 빌렸던 맛처마 밑 겨우 자리 잡은 김칫독,바람막이로 헌옷 껴입고 박스 한 겹 더 둘렀던가품고 엉겨 붙은 그 시절도 발효되어왔는지나 또한 이제 곰삭을 나이항아리를 쓸어본다반들거리는 표면에서 얼고 녹았던 꽃잠이 만져진다굴뚝은 어느새 동치미 한 사발 같은 연기를 흘리고허기를 몰아온다상상 그 이상의 추위 속에서칼끝으로 툭툭 쳐야 썰리는 김치가왜 또
독자시
엄세원
202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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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궈가 잡고 있는 피한 점 없는 낙엽초겨울 날씨 앞에 파르르 떨고 있다끝까지 놓지 못하는 눈물 고인 마른 생앙상한 나무가지 얼마나 잡고 있을까앙크란 물관 속으로 스며드는 돌기바람한 생을 남기고 가는 눈꺼풀이 떨린다아직도 생생한 날들 그 푸른 추억들이낙엽과 떨궈 사이 무겁게 남아 있어찬바람 그도 못 떨구고 돌아서서 지난다
독자시
박순자
2022.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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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두하는 눈이 있다접시를 탐색하던 얼굴은 도너츠를 놓고 달콤해진다마스크 속의 침묵을 상상한다한 입 베어 문 도너츠는 어떻게 변주될까도너츠의 달달한 주기는 힘이 세서몇몇의 얼굴에서 보쉬의 낙원을 떠올렸다구스타프 모로처럼 랭보가 감각이란 시를 새롭게 들고 나와생각 속을 굴러간다마스크 쓴 얼굴은 도너츠를 증명한다도너츠를 오브제로 놓고 세상을 앞에 놓고
독자시
김정미
202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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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이 훤하다.오늘이 발인이라지…차를 끓여야겠다.어느 부부가 구순 노모를 여의고장지로 모시는 이 새벽잠은 한잠이라도 잤을까?시린 아침이다.대추 10알과꿀 듬뿍계피 반스푼보온병에 담았다.대추차의 따스한 온기는 노모를 잃은 부부의시린 아침을 녹일 수 있으려나?
독자시
이경
202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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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 다거둬들인벌판이 허허 웃네어깨가가볍다며홀가분하다면서두 다리쭈욱 뻗고서깊은 잠에 드시네.
독자시
이향미
202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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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너무 아파서내 생각 한 조각을 꺼냈습니다.가슴이 너무 아파서내 마음 한 조각을 꺼냈습니다.눈이 너무 아파서내 눈물 한 조각을 꺼냈습니다.목이 너무 아파서내 소리 한 조각을 꺼냈습니다.이뤄질 수 없는 조각조각들인데맞추고 나니 어느덧 네 얼굴이 되었습니다.이미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난 아직 네 조각들을 다 지우지 못했나 봅니다.아직 내몸 구석구석에 네 흔적들이작고 작은 조각 조각이 되어 네가 남아 있나 봅니다.
독자시
이현석
202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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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글프지만은 않아.이름 모를 들꽃들을 보며‘이렇게 예쁜 꽃이 있었나?’하며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거든.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무심코 지나쳤던 하늘빛과산과 들의 풍경에도 관심을 가지게 돼.시끄럽게 떠들고 소란 피우는아이들의 모습에도짜증내지 않고 웃으며 넘길 수 있고,한 번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진심이 담긴 선행을 베풀기도 해.나이 들어간다는 것은,나만의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 같아.쓸모없는 것들은 몽땅 빼 버리고,하고 싶은 건 좋은 사람들과 마음껏 나누기도 하며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갈 수 있잖아!그러니,늘어가
독자시
조민정
202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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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정이만 남은 어머니 도리깨질하러 간다털어도 털어도 화수분처럼 나오는가슴에 먹장구름을 들어앉히고 뼛속까지 숭숭 바람길을 낸허리를 접어 흰 빠마머리 바닥과 가까워진 등골 휜 보살 만나러 간다콩대, 팥대, 흐드러진 나물 꽃, 푸성귀에 누런 호박덩이까지 빼꼼한 땅자리 하나 놀리는 게 없어 바퀴에 다칠라 조심스런 골목열 시간을 달린 트럭도 고롱고롱 괭이 목울대 소리 내는 걸 보니 도착이 반가운 모양이다딸이 하나밖에 없어서 올매나 다행이고, 둘만 됐어도 클 날 뻔했네옆집 아지매 웃음으로 죽비를 엮으시고바리바리 택배도 끊일 날 없는데무거운 된
독자시
이진여
202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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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인몰려오는 아침 햇살온 세상 눈 비비면사시절 꽃을 피워가지마다 달아 놓고꽃무덤 향기에 취해 얼굴 붉은 화부산솔향기 앞세워줄달음친 솔바람에등 굽은 천년 노송(老松)시퍼렇게 날 세우고줄타던 청설모 한 쌍 까치발로 키 높인다영욕(榮辱)의 긴 세월(歲月)을임영(臨瀛)터 굽어보며힘들고 어려울 때말없이 지켜주던해 저문 붉은 저녁놀 품고 앉은 화부산아.* 임영: 강릉의 옛 지명 * 화부산: 강릉시 교동에 위치한 산
독자시
임종길
2022.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