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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문패 아래 산 적이 있다온실에서 막 나와바람만 스쳐도 휘청였던제 터 잃고 남의 터에 몸 푼그 맘 내 모를까오면서 녹는 마음그 또한 내 모를까볕 한 올에도 눈물이 흐르던더부살이 속내말 안 해도 알지, 그 맘 내 알지
독자시
최명선
2022.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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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기 잠시 쉬며 물소리로 앉았으니세상사 주름 많은 눈꺼풀도 엷어지고메마른 가지의 새 움 눈물 아니 고이던가푸른 이 돋는구나 산골 물 저 소리들산색은 연둣빛 점점이 흩어지고나무에 새소리 두엇 풋내음이 나던 날맑아라, 하늘빛은 멀어서 은은하고복사꽃 지고 나니 봄도 이리 풀려나네물결에 떠가는 꽃잎 도원인 줄 알거나윤사월 햇빛 자락 푸름을 더하는데문 활짝 열린 뜰 앞 내 속 환히 보이것다참 좋다 일생에 몇 번 이런 날도 있구나그대 혹여 꽃잎 보고 내 집을 찾아들면큰 박주 항아리에 세속을 띄우리라근심도 맛 들이기 나름 종일 취해 보세나
독자시
남진원
202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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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동전 한 닢이 뒹군다누군가의 주머니를 뚫고 나온 동전뾰족한 슬픔처럼 떨어져 있다문득, 어리던 날부잣집 친구의 굴렁쇠 웃음소리가슴을 뚫고 들어온다내 주머니 속 십 원짜리 동전은부끄러워 발갛게 달아올랐다어젯밤 엄마 눈을 속이고돼지 저금통에 넣지 않았던 동전,그 동전 ‘달고나’ 속으로 녹아 들어간다‘달고나’는 별 모양, 달 모양, 해 모양으로내 입으로 살살 녹아 들어간다오후가 되면 내 심장은 콩알만 하게 되고엄마 목소리는 천둥소리가 된다어리던 날 군침돌게 하던 동전 한 닢이자꾸 목구멍으로 넘어온다별 모양, 달 모양, 해 모양, 우
독자시
반혜지
20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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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뒷산 넘어 고개 숙인 벼를 손으로 훑으면봄여름 내내 개구리울음 농사에 이어 풀무치 울고논두렁에 다다른 운구차는 비밀을 품고 돌아가고문상 가는 발걸음은 발걸음끼리 뭉쳐 도랑이 되는데작은 울음은 울음끼리 뭉쳐 밤하늘에 둥그러지고낱알의 걸음은 재잘대다 밥상에 올라 볕살 펴는데
독자시
한승태
20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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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남자가 담 넘어 옆집 백목련에넋이 나간 걸 안 날울안에 남아있던 한 송이 자목련 툭, 졌다천지간에 핀 꽃들 허공중에 길을 잃고저문 바람에 위태롭다오진 욕을 먹는다 해도꽃이 지는 슬픔을 감출 수 있으랴자꾸 꾸역꾸역 눈물 나누나오직 북쪽을 향해서만 핀다는 저 하얀 꽃숭고한 사랑이라 말하지 마라비양심이라고 귀싸대기를 갈기니늦은 참회로 또 늦게 운다
독자시
강선영
202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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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문 빗장 풀고찾아든 봄바람에푸성귀 바리바리난전서 봄을 판다검버섯찌든 얼굴엔웃음꽃이 환하다
독자시
이형식
2022.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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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자작나무 껍질에 연애편지를 쓰는 청춘에 대해그 청춘의 설레임에 대한 시를 쓰거나해당화나 동백꽃이나 그 꽃잎처럼 붉은찬란한 사랑에 대해 시를 쓰거나그도 아니면이백이나 도연명처럼 초월과 은둔과그 어떤 위대함에 대한 시를 쓸 줄 알았는데여전히 나의 시는 분노로 가득 차 있고여전히 쓸쓸하고 외롭고 또 가엾은 것들뿐이다세월호는 여전히 인양되지 않았고일용직 노동자의 주검은 장례 전이니나는 언제쯤에 가 닿으면풀잎의 이슬에 비친 사랑의 애틋함이나소한(小寒) 들판에서 바람을 견디는 저절정의 경건함에 대해 쓸 수 있으랴
독자시
김남극
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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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침묵한산 안으로 간직해 온분홍빛 사랑 노래봄빛에 풀어놓고선연히 봄날을 태워건네주는 봄 편지
독자시
김기옥
20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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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혹한 속을 나목으로 견뎌내고춘삼월 봄 입김에 못견뎌 터진 가슴화르르 하얀 불꽃 속으로 나비 떼가 날아든다보내고 돌아서면 후회로 젖는 가슴기다림 길어질까 보고 또 쳐다보고또 한 봄 흔들고 가는 바람 부는 날 벚꽃들불같이 급한 성격 피는 것도 불길 같고지는 것도 불길 같아 꽃바람 부는 날에걸어온 가로수 길에 쌀튀밥 같이 쏟아진다
독자시
박순자
20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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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니 봄이구나 들썩이는 봄의 들판농부들 쟁기 대신 트랙터로 밭을 가네빗질한 고운 들녘에 들일 손이 뉘신지꽃 피니 나비 날고 봄바람 시샘하네연분홍 물감 풀어 향촌의 봄 그리니바둑이 속없이 짖으며 저도 그려 달란다
독자시
임춘자
202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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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입 봄비는 연둣빛 짙게 하고생명의 대지 위엔 새 순의 용틀임들그래도 기다리던 비 행복 주는 마중물농염한 햇살 아래 들꽃은 만개하고온 누리 잎새마다 재잘거림 넘친다이 비는 만물의 희망 축복의 비 아닐까온종일 추적이며 내리는 빗물위에촌로의 작은 소원 방울방울 모이면달콤한 자양분의 맛 어머니의 품이다
독자시
이명호
202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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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를 펼쳐 읽는 어느 봄날 저물녘세상의 중력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마리배추흰나비날개바람 살랑인다.꽃심에 앉아도 미동 않는 꽃의 반응고요 깃든 날갯짓에 세상이 잠들었나가만히숨죽인 나도꿈속인 듯 아련하다.날아야만 나비라는 관념의 꽃밭에서날개 접어 꿈을 꾸는 영혼의 착한 무게꽃잎에마음을 더한딱 그만큼의 존재여.책에서 빠져나온 상념이 엄습한다나는 누구이며 나비는 무엇인가어느 봄날 저물녘에꿈꾸듯이 장자를 읽다
독자시
심재원
20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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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버려진 찔레꽃 가지꺾이지 않으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발바닥이 온통 상처투성이다오는 길 매웠으면 사는 길은 고와야지손목 잡고 집으로 와 꽃병에 꽂는다얼마가 지났을까구겨 넣었던 봄이 꿈틀거리면서시든 꽃잎 위로 살아나는 길그렇게 꽃의 한 시절은 열렸다가 닫히고아무렇지도 않게 꽃병을 비우려는 순간깊디깊은 심연에서살뜰히 죽어가는 곡진한 생의 뿌리정작 그 봄은 누구의 것일까찔레 가지는 찢긴 발로 꽃의 길을 만드는 동안나는 그저 꽃만, 꽃의 낯만 본 것이다
독자시
최명선
202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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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사는 친구가보내온 편지 속에진달래 한 다발이활짝 피어 있구나머잖아내 가슴에도꽃물이 번지겠지.
독자시
김선영
202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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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한 봄날, 우연찮게 불청객이 되어앵두나무네 합동 혼례식을 구경 했었지요하얀 면사포 꽃 신부들은 수줍어하고요벌 신랑들은 연미복 팔락이며 들떠있더군요아들딸 주렁주렁 낳아 다복하게 잘 살라고축의금 대신 축복이나 해주고 돌아왔는데요사는게 다 그렇데요, 앵두나무집을 다시 찾아갔을 때지난 폭풍우에 바다로 나간 배가 여태 돌아오지 않았는지사내도 그 많던 새색시도 어디 가고 젊은 아낙 예닐곱볼탱이 빨간 자식새끼 품고 있는데, 맘이 참 그렇더군요파란 기와집 마당에서 미역줄기는 저 홀로 말라가구요
독자시
김영삼
2022.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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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칫,다가가지 못해봄을 놓고 갑니다달빛이 몸을 감아나부끼던 어느 날꽃말은 녹이 슬어 하염없이 쌓이고모서리에 남은 침묵바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백목련 꽃말: 이루지 못할 사랑*백목련 꽃말: 이루지 못할 사랑
독자시
이정화
202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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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길 건너이층집이 헐렸다 간판 달고 있을 땐몰랐는데뒤뜰이 보였다거기 우두커니 나무 한 그루거무튀튀한 맨몸으로빈 뜰 지키며 혼자 서 있더니어느 날 발그스럼 꽃망울이 보였다아직 이름도 모르는데오며 가며 말 걸어 주었다넌 꽃 피울 생각하며추운 겨울 홀로 견디었구나그래, 꽃 피고 나면 맛있는 열매가 달릴 거야주문진 봄바람은 거칠고 사나워장독 뚜껑도 날리는데용케도 분홍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곱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로칭찬해 주고 싶은 저 살구나무엷은 분홍 꽃잎을 온 동네 흩날리는데집 팔고 이사 간 주인에게편지를 보내는
독자시
이구재
202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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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 아랑곳없이온 산에 생강나무꽃 한창인데소리꾼에게 혼을 뺴앗기고세월을 거슬러 오는 남자황진이를 만났다면 어땠을까그래도 여전히 동백꽃은노랗게 피었을까소양강에 달이 뜨기를 기다렸으나달은 뜨지 않고애증의 강물만 출렁거렸을까진탕만탕 꽃은 피는데황진이 쳐다나 보았을까명창 박녹주를 애청하다가한 남자의 혼을 쏙 빼앗아간그 여인이 마냥 부러웠다아니, 소리꾼이 되고 싶었다그리하여 내 집 문간에 와서고래고래 소리치는안광이 서늘한, 그런 사내와아침을 달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작가 탄생 100주년사혼제덜컥, 문 열리는 소리녹주, 내가 왔고 유정이가
독자시
최숙자
202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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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자들이 지폐를 모으려고 숲에 살충제를살포한 날로부터,겨울과 맞서 싸워 이긴 3월이 와도, 숲속의새들이 상여 소리를 낸다마을어귀에서 산그림자가 사산된 저녁,어둠으로 모든 길이 지워지고 있다밤마다 신열을 내는 고슴도치와서산을 넘던 새들도외눈박이 포수의 엽총에 맞아경련을 일으킨다흑두루미가 플라스틱알갱이를 쪼아 먹고유골단지 속으로 들어간다목탁조들의 목쉰 노랫소리,카렌다 속에서 해가 몇 번 뜨고 져도끊이질 않는다공장이 뱉어낸 폐수에 실신한 물고기떼,동공이 풀린눈동자 속에천국의 문이 열려있다살충제가 싸락눈처럼 쌓인 식탁,눈이 큰 짐승들의
독자시
정계원
202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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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 마당에 산당화는그윽이 내려다보는 하늘 향해분홍 입술을 환히 열고 있습니다그 곁에 산채로 타오르는 향나무바람이 불어와 흠향하고 갑니다나무마다 새잎 돋아나고발끝에 묻어오는 초록들판쑥국 좋아하는 당신 생각하며밭두렁에 주저앉아봄날을 뜯었습니다오늘저녁 밥 말아 드시고파릇하게 살아나시길
독자시
백혜자
2022.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