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역군이 되기 위해선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기술이 곧 밥이자 자존심이었기에 손이 부르터라 일을 하고 찬밥 먹어가며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힘들게 배운 기술을 누가 쉽게 가르쳐 주었을까? 내 밥통 줄어든다고 감추던 기술, 눈칫밥 먹으며 배운 기술을 널리 알린 양복장이가 여기 있다.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재소자들에게 기술을 알렸다. 50년을 이어온 노포(老鋪), 팔호광장 박제남 테일러샵이다.

춘천 팔호광장의 박제남테일러 간판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춘천 팔호광장의 박제남테일러 간판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4월 중순 20대 대선을 마치고 지선의 시작을 알리면서 여기저기 분주한 분위기의 오후 도심을 가로 지르는 차량들 사이로 빛바랜 간판이 보인다. 50년, 춘천 팔호광장 인근에 위치한 박제남 테일러샵의 시간이다. 한국의 양복 역사와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간이다. 주변 건물들이 무너지고 하나둘 씩 하늘을 찌를 듯 한 높은 건물이 들어섰고 어르신이 담배 팔던 동네가게는 24시간 편의점이 시가지를 비추고 있다. 그 한가운데 낡은 건물이지만 깔끔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는 박제남(76) 대표의 테일러샵. 밝은 빛을 내뿜는 24시간 편의점은 아니지만 빼곡하게 들어선 가게 사이에서 박제남 테일러샵은 오래된 가게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정표와 같다.

가게 내부의 벽면은 온통 손길을 기다리는 원단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매장 가운데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있다. 끝은 날카롭지만 손잡이는 왠지 따뜻하고 부드러울 것 같은 커다란 가위가 눈에 띈다. 휘어진 자에서도 철의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어서오세요”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혀있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기자를 반겼다. 박 대표가 오래된 가게라 부끄러운 듯 연신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테일러샵이 위치한 춘천 팔호광장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도시계획 결정 시 도면에 표시된 번호 ‘8호광장’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며 정식 명칭이 되었다. 5개 차로가 하나로 합쳐지는 커다란 광장이 있어서 주변엔 광장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가게들이 많다. 광장서적, 광장 주유소 등 도시계획이 진행되는 중심가였다. 1973년 박 대표는 현재 운교동에서 운영중인 ‘박제남테일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금메달 양복점’을 열었다. 19m²(6평) 정도의 작은 점포였지만 한 번 찾아주는 고객이 있을 때 마다 신용과 친절, 정성과 기술을 다해 손님들을 맞이한 덕분에 박 대표의 양복점은 양복 잘 만드는 집으로 소문이 나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박제남 대표의 어린 시절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박제남 대표의 어린 시절

6•25전쟁 발발로 인민군에게 희생된 아버지를 대신해 박 대표는 17살의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박 대표는 춘천시 낙원동에 위치한 동해양복점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과시간에는 일을 하고, 퇴근시간이 지나면 홀로 남아 기술을 익히며 공부를 해야 한다는 향학의 불길을 접지 않았다. 5년 동안 일했던 동해양복점이 문을 닫게 되자 박 대표는 국제라사로 직장을 옮겨 양복 만드는 일에 더욱 매진했다. 노력의 결실이었을까? 1970년 강원도 기능경기대회에서 양복부문 금메달을 수상하고 전국 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하면서 양복기술자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교도소에서 양재강의를 하던 박제남 대표
교도소에서 양재강의를 하던 박제남 대표

박 대표는 18년 동안 춘천교도소, 대전교도소 등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재봉기술도 가르쳤다. 1981년 춘천시 약사동에 있는 청송 제3감호소 양재강사로 위촉되어 매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의 시간을 재소자들과 함께하며 재단 및 봉제 기술을 가르쳐 주었고 그들이 살아가야 할 긴 인생길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18년 동안 양재강사로 강의를 하면서 150명이 넘는 양복기능사를 배출했으며 박 대표의 제자였던 재소자들은 현재에도 수백 통의 편지를 보내며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대통령표창, 장관표창 등 100여건의 수상으로 돌아왔다.

박제남 대표의 대한민국 양복명장 명패
박제남 대표의 대한민국 양복명장 명패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병마가 그를 찾아왔다. 잘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가슴을 내리 누르는 압박감이 되었을까? 불안감과 불면증은 급기야 위암으로 번지고 말았다. 박 대표는 약 없이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위태로운 나날들 속에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무척이나 힘든 상황이었지만 박 대표는 팔순이 넘은 노모, 옆에서 고생하는 아내 그리고 어리기만 한 두 자식들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재기에 힘썼다. 병마와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박 대표는 양복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고 투병 생활을 이어가던 중에도 재소자들을 위한 교육을 멈추지 않았다.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박 대표를 돌 본 아내 덕분에 점차 몸을 회복하기 시작하면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오직 가족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양복을 만들고 소외 계층을 위한 꾸준한 재능 기부 덕분에 박 대표는 1991년 ‘대한민국 섬유분야 양복 직종 명장’에 선정될 수 있었다. 또한 양복명장에 선정된 날은 박 대표의 44번째 생일날이었기에 박 대표는 “꿈같고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한민국 최연소 양복 명장 타이틀을 가진 박제남 테일러
대한민국 최연소 양복 명장 타이틀을 가진 박제남 테일러

“모름지기 양복은 앞, 옆 모두 일정하게 주름없이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박제남 테일러. 박 대표가 만들어내는 가지런한 양복은 올곧게 살아왔던 그의 인생을 말해준다. 양복은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박 대표는 “앞으로 남은 일생도 양복을 위해 양복장이로 꿋꿋이 걸어가겠다” 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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