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歲寒圖). “우선은 감상하라(藕船是賞)”고 적혀있는데, 우선은 이상적의 호이다.

는 추사 예술의 최고 명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을 보여준 것이다. 는 실경산수화가 아니다. 추사 마음속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다. 에서 더욱 감동적인 것은 서화 자체의 순수한 조형미보다도 그 제작 과정에 서린 추사의 처연한 심정이 생생히 살아있는 점이다.

추사가 를 그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귀양살이 5년째인 1844년에 이상적이 연경에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이라는 책을 구해 보내준 것이다. 자그마치 120권 79책으로 그 양도 무척 방대했다. 이상적의 정성에 추사는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추사는 이상적의 변함없는 정에 감사하는 뜻으로 를 그리고 그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지난해에는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세사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천만 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歲寒) 뒤에야 송백(松柏)이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된다” 하셨는데 (…) 완당노인이 쓰다.

뜻밖에 추사로부터 천하의 명작을 선물받은 이상적은 너무도 기뻤다. 그는 몹시 감격하여 추사에게 깊은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

“삼가 한 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림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분수에 넘치게 칭찬해 주셨으며 감개가 진실로 절절했습니다. (…)”

그해 10월 이상적은 를 가지고 연경에 갔다. 그리고 이듬해 그의 벗인 오찬(吳贊)의 잔치에 초대를 받는다. 이 자리에서 이상적은 추사의 를 펼쳐보이니 모두 격찬을 아끼지 않으며 다투어 시로 혹은 문장으로 제(題)와 찬(贊)을 붙였으니, 이것이 세한도에 붙어있는 「청유16가(淸儒十六家」의 제찬이다.

귀국 후 이상적은 장대한 시화축으로 장정한 것을 추사에게 보고삼아 또 자랑삼아 보여주었다.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1803~1865년)

이상적은 9대에 걸쳐 30여 명의 역과(譯科) 합격자를 배출한 역관 가문 출신이다. 그의 처가인 설성(雪城) 김씨 또한 역관 집안이다. 19세기에 역관 문인들은 능숙한 중국어 회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청의 문인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이상적이다. 이상적은 열두 차례나 청(淸)에 다녀왔으니, 젊은 시절의 절반은 연경에 머문 셈이다. 이상적은 청(淸)의 문인들에게 받은 편지를 모아 『해린척독(海隣尺牘)』이란 서한집을 간행했는데, 이는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하늘 저 끝이라도 이웃과 같다(海內存知己,天涯若比隣)”라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중인이라 차별대우를 받았지만 하늘 저 끝에서는 이웃으로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다.
 

고추밭을 지나 덤불을 헤치고 올라가니 우선(藕船)의 사적비가 빼꼼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를 탄생케 한 선생의 묘소에 묘도(墓道)조차 없는 것이 송구스런 마음이다.
 

우선 이상적 묘소와 사적비. 포천시 사정리.

사적비는 선생 사후 130여 년만인 1995년에 우봉 이씨 종친회에서 건립하였다.

노란색 원의 작은 비석에는 우선 우봉이공 상적지묘(藕船 牛峰李公尙迪之墓)라 쓰여있고 뒷면에는 선생의 생몰과 부인(配) 설성김씨 합폄이라고 적혀있다.
 

묘역 뒤에서 내려온 맥로가 부인 묘소에 11회절, 선생 묘소에 10회절 명당을 맺었다. 묘소는 비교적 상당한 역량의 명당에 자리하니, 이 땅의 후학들에게 우선(藕船)의 삶은 끊임없이 반추될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름난 역관 가문 중 하나가 해주(海州) 오씨이다. 이상적과 함께 역과에 2등으로 합격한 이가 오응현인데, 그는 이상적을 자신의 아들 오경석의 스승으로 모신다. 동방(同榜) 중에 이상적의 실력이 뛰어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상적은 오경석을 비롯한 역관 자제들에게 역과 시험만을 지도한 것이 아니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해린서옥(海隣書屋)에 소장한 골동과 서화 등을 보여 주면서 그들의 안목도 키워준 것이다. 훗날 오경석이 귀중한 골동·서화를 수집하여 문화유산을 보존한 것, 이상적과 함께 연경을 다녀오면서 서구의 침략과 청의 쇠락을 목격하면서 개화사상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상적으로 인하여 발양된 것이다.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년)

19세기 중엽, 개화사상의 비조로서 역관·서화가·금석학자이며 특히 전서체를 잘 썼다. 연경을 왕래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개항론을 주장했다. 박규수·유대치·강위 등과 더불어 초기 개화파 인사로 북학파에서 개화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역할을 하였다. 병인양요의 해결과 강화도 조약 체결에 참여하여 전란방지에 공헌하였다.

오경석의 묘소를 찾는 중에 만난 한 주민의 말이다. “오래 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저 아래 있었는데 청평댐으로 수몰되었다고 들었어. 오대감 집이었었다고 기억하는데...” 오경석은 대대로 부유했던 역관 집안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매 오경석 묘소. 가평 회곡리.

깊은 산속 빽빽한 나무숲이 가려 외부에서는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선생의 비석은 없으나, 오(吳)씨 집안 후손들의 묘소가 전면에 자리한다.
 

서남방에서 진입한 맥로는 역매 묘소에 14회절의 대명당을 맺는다. 묘역 전체가 명당판이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년) 묘소. 중랑구 망우리.

오경석의 차남으로 태어난 위창은 1880년 17세에 사역원 시험에 합격하여 대를 이어 역관이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스승인 유대치(劉大致)와 연루되어 수난을 겪는다. 1906년에는 항일 언론지인 만세보(萬歲報)사장을 역임했고,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다. 1946년, 일제에 빼앗겼던 대한제국의 국새(國璽)를 미군정으로부터 넘겨받을 때 국민을 대표하여 받은 이가 위창이다.
 

뒤에서 내려온 맥로가 위창 묘소에 10회절 명당을 맺는다.

위창은 서화감정에 있어서 독보적인 권위자였다. 진위(眞僞)판정에서 위창이 맞다면 맞고 작자 추정에서 위창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위창은 그런 안목으로 우리나라 서화사를 집대성했으니 옛 그림과 글씨 수천 점을 모아 ,, 등을 편찬했고, 게다가 몇 십명의 학자가 몇 십년을 걸려야 가능하였을 역대 서화가 인명사전인 의 편찬을 홀로 해냈다. 위창의 금강안식(金剛眼識)은 역매에게서 이어받았고, 역매는 추사의 말년 제자이니 위창의 안목과 문화보국 정신의 발양은 추사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위당(威堂) 신헌(申堂,1810 ~ 1884)

1843년, 바다 건너 해남에는 추사가 아끼던 제자 중 한 사람인 신헌이 전라우수사로 부임해 왔다. 그는 무관 가문에서 태어나 무관으로 출세했지만 다산과 추사의 문하에 드나들며 실사구시의 학문을 닦아 유장(儒將)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도 높았다.

훗날 신헌은 실학자로서 박규수·강위 같은 개화파 선비들과 교유하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제작을 도와주기도 했다. 1849년에는 임금을 호위하는 금위대장에 올라 헌종을 가까이서 모셨으며 나중에는 삼도수군통제사·형조판서·한성부판윤까지 올랐다.

그는 또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가 되었고, 1875년 운요호 사건 때는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에 임명되어 이듬해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1882년에는 요양 중에 다시 전권대관이 되어 조미(朝美)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위당 신헌 묘소. 춘천시 용산리.

신헌이 34세로 전라우수사로 왔을 때 그는 한창 금석학에 심취해 있었고, 추사가 일으킨 서화의 신풍에 따라 개성적인 글씨를 추구하였다. 신헌은 추사에게 자신의 부임 소식을 알리고 여러 물품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수시로 자신이 쓴 시와 글씨를 추사에게 보내 평을 부탁했고 아울러 추사의 글씨도 요구했다. 추사는 신헌에게 소치(小痴, 許鍊)를 소개하며 강력하게 추천한다.

“소치의 화법(?法)은 종래의 고루한 기습을 떨쳐 버렸으니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을 것입니다. 영감이 아니라면 누가 이 사람을 알아주겠습니까.”

신헌은 헌종의 깊은 신임을 받았는데, 소치가 헌종을 배알할 때 그를 데려가 주기도 했다.

또한 추사는 신헌에게 해남 일지암의 초의스님을 만나 볼 것을 권했다. 초의를 만나자 두 사람은 더없이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훗날 초의스님이 입적했을 때 신헌이 그 비문을 썼다. 추사와 신헌의 서신 교류는 신헌이 전라우수사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1846년 1월까지 3년간 계속되었다.
 

신헌 묘소 뒤(상)에 자리한 조부모(청룡방)와 부모(백호방) 묘소.

조부 신홍주(申鴻周, 1752~1829)는 정조 2년(1777)에 무과에 급제한다. 1811년 홍경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좌·우포도대장이 되었다. 이후에는 삼도수군통제사·어영대장·병조참판·훈련대장을 역임했다.

부친 신의직(申義直, 1789~1825)도 순조 10년(1810)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인동부사·백령첨사 등을 지냈으나 부친보다 4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신헌 묘역으로 진입하는 근접 맥로도.

묘역의 백호방에서 출발한 맥로가 좌선(左旋)하여 진입하는데, 맥로는 부친 묘소를 지나 신헌 묘소에 12회절의 명당을 맺으니 묘역의 주혈이다. 부친 묘소는 맥로가 통과하지만 길흉경계선 안에 자리한 6회절 명당이다. 다만, 조부모 묘소가 청색의 길흉경계선 밖에 자리하니 조모를 흉지에 모시고 신헌의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판단된다.

1849년, 헌종이 스물 셋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헌종의 급서는 추사와 권돈인에게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추사가 귀양 갈 당시 정국은 안동 김씨들이 순원왕후(김조순의 딸)를 등에 업고 정국을 주도했었다. 그러다 헌종이 친정체제로 되면서 신정황후(헌종 모친, 조만영의 딸)쪽의 조만영·조인영 그리고 권돈인 등의 반(反)안동 김씨 세력에 힘이 실렸다. 이 때 권돈인이 영의정을 지냈고, 추사 또한 제주도에서 해배(解配)된 것이다.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안동 김씨들은 열아홉 살의 원범(元範,철종)이 대통을 잇게했다. 그러면서 왕통(王統)과 왕가의 가통(家統)에 혼선이 생기고 예송(禮訟)문제가 발생한다. 예송문제로 파워게임에서 밀리자 권돈인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봇물 터지듯 일어났다. 대비는 권돈인을 향리(鄕里)로 방축하는 명을 내리나 안동 김씨들의 공격은 그칠 줄 몰랐다. 권돈인은 다시 낭천(화천군)으로 중도부처 되었고 추사 또한 예순여섯의 나이에 삭풍이 몰아치는 북청(北靑)으로 유배길을 떠난다.
 

이재(彛齋) 권돈인 (權敦仁, 1783~1859년) 묘소. 충주시 서운리.

묘소 뒤에서 바라본 풍광은 멋진 동양화를 방불케 한다.

권돈인은 과거에 급제한 이후 요직을 두루 역임한다. 풍양 조씨의 지지를 받는 동안에는 형조·병조·이조·공조 판서를 거쳐서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한다. 철종 즉위 후에는 안동 김씨의 탄핵을 받아 연산(連山) 배소(配所)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정은 이도 모른채 해배(解配)를 명하니 이재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이었다.

추사의 그림자 같은 벗은 권돈인이었다. 권돈인은 추사보다 세 살 위였지만 가장 막역하게 지낸 벗으로, 무수한 시·서·화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화답하고 합작하고 합평(合評)했다. 그들은 글씨 또한 비슷했다. 학예(學藝)로 말하자면 추사가 베푸는 입장이었지만, 세상사와 인간적인 일에서는 추사가 권돈인에게 도움을 받으며 감사하는 처지였다. 권돈인 또한 를 그렸는데, 권돈인의 는 추사의 그것과 똑같이 겨울날의 정취에서 그 뜻을 가져왔지만 분위기는 매우 다르다. 추사는 갈필을 구사했지만 권돈인은 윤필(潤筆)을 강조하여 좀더 온후한 느낌을 준다. 이는 두 사람의 성격 차이이기도 했다.

권돈인은 추사 사후 뒷일도 감당해주었다. 또한 추사의 제자 이한철에게 흑단령을 입은 추사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다음과 같은 화상찬을 썼다.

(...) 슬프다! 선생이시여! 캄캄한 밤의 밝은 달, 비 온 뒤의 밝은 햇살, 상쾌한 바람같은 존재이시여! 순수하고 아름다운 옥과 같은 인격이시여! 실사구시하는 학문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습니다(山海崇深). (...) 공자님 말씀에 “세상이 받아주지 않은 다음에야 참다운 군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라고 하시더니 선생이야말로 그러하셨습니다.
 

이재의 부친 권중집(權中緝, 1771~1814) 묘소. 이재 묘소 좌록(左麓).

묘역 전체의 핵심 주혈에 모셨다.


 

이재의 계배(繼配) 청주 한씨 묘소. 원래는 제천에 모셨었는데, 수몰(水沒)을 피해 1982년 시아버지 묘소 아래로 이장한 것이다.
 

위성지도에 표시한 이재 묘역 맥로도.

남쪽에서 북진하던 맥로가 묘역에 이르러 분지(分枝)하니, 주혈은 부친 묘소로 차혈은 이재 묘소로 진입한다. 모두 상당한 명당에 잘 모셨다.

부친은 생전에 진산군수를 지냈지만 사후에 14회절 명당에 모신 것이 아들인 이재의 화려한 관록에 풍수적 뒷심이 되었다는 판단이다.

부친 묘소 하단으로 이장한 한씨 묘소는 12회절 명당, 이재 묘소도 또한 12회절 명당이다.

추사는 인복이 대단했다는 생각이다. 스승 박제가를 만난 것, 연경에서 옹방강과 완원을 만난 것, 죽음의 문턱에서 그를 구한 벗 조인영, 평생의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지기지우(知己之友) 초의와 권돈인을 만난 것, 지극정성의 제자 소치와 우선을 만난 것, 위의 이들은 평생에 한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운 것인데... 모두가 추사의 큰 인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은 덕으로 인해 받는다고 했으니 추사의 인덕은 인복으로 내린 것이리라.



@ 풍수 이외의 많은 부분은 유홍준의 에서 옮겨왔습니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