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전부터 해마다 원주에서는 음력 1월 21일 치악산 남쪽 등성마루에 있는 영원산성 유적지에서 영원산성 대첩제가 열린다.

고려 후기 원충갑 선생(1250∼1321)이 이곳서 웅거하며 카단(哈丹)적의 침략에 맞서 승전한 날을 맞아 기념 의식을 올림으로써 원주의 얼과 맥을 지켜가자는 뜻이 담겨있다. 뒤늦었지만 현대 들어 민관군합동으로 영원산성 전투 승전의 날을 기릴 정도로 원충갑선생의 업적은 원주지역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원충갑 선생의 카단적 방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고문헌에서 칭송하고 있다.

고려말 원주목사를 지낸 설장수는 “영웅과 같은 위엄으로 홀로 천 사람의 군진을 쓸어 버렸다”고 했다. 역시 원주목사인 金濤는“한 칼로 공을 이루고, 의로써 일을 하였다”고 밝혔다. 조선 건국의 주역인 趙浚은 “백면의 젊은이가 한 칼로 전공을 높이 세웠다”고 평가했다.

원충갑선생은 고려 고종 37년(1250년) 원주에서 출생했다. 젊은시절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며 용모에 관해 ‘몸이 적고 정갈하였으나 눈빛은 마치 전광처럼 빛났고 어려운 일에 임하면 분연히 일어나 몸을 아끼지 않고 그 일을 처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차고 결단력 있으며 과묵하나 통솔력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카단족의 침입이 있기전 이미 고려시대 원주에서는 앞서 두 번의 외족 침입이 있었다.

첫 번째는 1216년 거란 유족(遺族)인 금산(金山) 왕자와 금시(金時) 왕자가 고려를 침범했을 때의 일이고, 두 번째는 1251년 몽고의 3차 고려 침입 당시 쑹주(松主)가 이끄는 동로군이 강릉과 철원, 춘천, 양근성을 공략할 당시 별동대를 보내 원주를 공격하게 했을 때의 일이다. 원주가 외적 침입 때 주 공략 대상이 됐던 것은 원주가 중부 내륙지방을 공격하는 과정에서의 지리적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는 외적의 입장에서 원주 흥원창의 곡식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됐기 때문.

원충갑선생이 결사적인 항전을 치른 것은 1290년 카단(哈丹)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의 일이다. 카단은 1287년 元나라의 내전 과정에서 생겨난 반란군으로 14년 동안 계속되다가 1301년 끝 맺게 되는데 원주 침략은 이 과정에서 일어난 것. 원주 침략은 1291년(충렬 17) 1월 15일부터 시작된다.

당시 원충갑선생은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원주의 별초(別抄)에 소속되어 있었다. 선생의 활약상에 대해서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동국전란사’등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1월 15일(갑인일) 카단적이 원주에 주둔하고, 50여명의 기병이 치악성 아래에 이르러 소와 말을 약탈해 갔다. 이에 원충갑이 보병 6명을 인솔하고 이를 추격하여, 적의 말 여덟 필을 빼앗아 돌아 왔다.’

‘1월 19일(무오일) 카단적은 투라트·두오나이·부란 등의 인솔하에 군사 400여명으로 다시 치악성 밑에 와서 관리들의 녹으로 줄 쌀을 가져가려고 하였다. 원충갑이 결사대 중산(仲山) 등 7명과 함께 적의 행동을 엿보고 있었는데, 중산이 먼저 적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한 놈을 베고 형문(荊門) 밖까지 추격해 가니 적들이 안장 얹은 말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1월 20일(기미일) 적이 다시 와서 기치를 많이 펴들고 성을 몇 겹이나 둘러 싼 후 사절 한 명을 보내어 항복하라고 권유하였다. 원충갑이 돌진해 나가서 사신을 쳐죽이고 그 돌을 머리에다 매어 던지니, 적들이 퇴각하여 성을 공격하는 도구를 많이 만들므로 성안에서는 공포에 떨게 되었다.’

‘1월 21일(경신일) 적들이 또 양근성에서 포로가 되었던 여자 2명을 내세워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원충갑은 또 그들을 베어 버렸다. (중략) 이 전투에서 카단적 투라트 등 68명을 베어죽였으며, 쏘아 죽인 적군의 수는 거의 절반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적들의 예봉이 꺽이고 감히 공격도 노략질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여러 고을들도 굳게 방어하게 되었다. 원주방어별감 복규는 이때 포로로 잡은 53명을 4월에 개경에 이송하였다.’

카단적과의 전투는 1291년 1월 15일, 19일, 20일, 21일 4차례 벌어졌는데, 그 중심에는 항상 원충갑의 활약이 돋보인다. 선생은 전통적인 산성 전투의 강점을 살렸으며, 원주지역의 양반별초부대가 선생의 지휘하에 적극적으로 방어전쟁을 수행한 결과였다.

이 승리에 대해 사학계에서는 영원산성이 춘천의 봉의산성이나 충주산성 보다 험준한 지세에 있었다는 점 외에 원충갑 개인의 죽음을 불사한 평지 기습전의 승리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영원산성 전투 평가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한 李仁在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원충갑선생이 소속된 부대는 별초(別抄)인데, 별초의 어의는 용맹한 자들을 뽑는다는 것이지만 실제 선생은 카단적 칩입 때에 급조된 양반 별초에 소속됐던 것으로 보인다”면서“카단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방 양반으로 구성된 양반 별초 부대가 원충갑의 지휘하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밝혔다. (논문 ‘1291년 카단(哈丹)의 침입과 영원산성의 원충갑 항전’)

특히 원충갑이 중심이 된 영원산성의 승리는 작게는 원주를 구하였고, 크게는 고려를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피력했다.

원충갑선생은 이후 54세가 되던해 대신 50여명과 함께 일궐해 홍자첨, 오기 등을 검거해 원나라로 압송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충숙왕 6년(1319)에는 공신의 호를 받았다.

조선 현종 10년(1669년) 원주시 평원동 일원에 충렬사를 건립해 원충갑선생을 비롯 조선 임진왜란당시 순절한 문숙공 김제갑(1525∼1592) 충장공 원호선생(1533∼1592)을 배향했으나 고종 8년(1871)에 훼철돼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1994년 충북 괴산 충민사에서 충렬사 사액 현판이 발견됨으로써 원주지역에서는 충렬사 복원계획을 하루빨리 완성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이와함께 영원산성 유적지를 제대로 보존해 강원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알렸던 체취를 누구나 쉽게 맡을수 있도록 해야한다.

朴美賢 mihyunpk@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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