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뉴스Q

기사검색

본문영역

유강하의 대중문화평론

싸움터가 된 수요집회, 뉴스는 쓰나미처럼 상처를 덮쳤다 “사는 거나 죽는 거나 의미가 없었어요. 그래도 여기에 나오면서부터 내가 진짜를 살게 된 거에요… 어디 가서나 부끄러움 없이 있던 그대로 다 말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시원하던지요.” -길원옥 할머니 다큐멘터리 영화 ‘어폴로지(Apology,2016)’ 중

[유강하의 대중문화평론] 소녀상의 침묵

2020. 06. 13 by 김여진

언제부터일까,뉴스가 쓰나미로 몰려온다는 생각을 했다.뉴스의 종류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때로 한 사건에 뉴스가 쓰나미처럼 무섭게 덮쳤기 때문이다.그럴 때면 모든 기사의 물량이 한 사건에 몰렸고, 그 사건은 곧 십자포화를 맞아 너덜너덜 해져서 실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속보니 특종이니 하며 정보가 빠르게 업데이트 되는 듯 했지만,기사는 엇비슷해서 특징이 없는 비슷한 얼굴이나 가면처럼 보였다.기사와 뉴스를 잠깐 멀리하고 나서야,겨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지난 5월,바이러스보다 무서운 속도로 기사가 증식되었던 사건(여기에 과연 ‘사건’이라는 말을 붙여도 될지 모르겠다)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이를 후원하는 단체의 대표 사이에서 시작되었다.일본군 위안부였던 기억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이용수 할머니의 분노는 이번에 국회의원이 된 윤미향 의원을 향해 있었다.윤 대표와 정의기억연대가 십자포화를 맞고, 불법,횡령,사기,조사,소환 등의 단어가 기사에 덧붙여지는 동안 정의기억연대 쉼터의 손영미 소장은 목숨을 끊었다.오랜 세월의 헌신을 뒤로 하고,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해야 했던 손영미 소장의 고통은 어떻게 위로하고 기억해줄 것인가.할머니들의 고통을 기억하자고 오랜 시간 헌신했던 그녀의 죽음은 이미 고인(故人)이 되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죽음처럼 애처롭고 아팠다.

 

늘 그래왔듯 이처럼 십자포화를 맞는 사건들은 시간이 지나야 그 윤곽을 겨우 더듬을 수 있게 된다.지금으로서는 이용수 할머니의 노여움이 풀리기를,모든 일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무엇보다 안타깝고 슬픈 것은 지금의 이 일이 ‘사건’이, 논란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이,매주 기록을 경신하며 평화롭게 진행되던 수요집회는 싸움터가 되어가고,소녀상은 훼손되고 있다.소녀상에 씌워졌던 마스크가 벗겨지고,돌로 찍히고,반듯하고 단정한 이마에는 흉한 낙서가 새겨졌다.각 지역에 세워진 소녀상들은 은밀하면서도 대담한 방법으로 훼손되고 있다.오늘의 이 일을 훗날의 누군가는 ‘논란’으로 기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자꾸만 마음에 그늘이 진다.

고 손영미 소장이 가족처럼 돌보았다는 길원옥 할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하지 못하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길원옥 할머니는 티파니 슝(Tiffany Hsiung)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어폴로지(Apology,2016)’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사는 거나 죽는 거나 의미가 없었어요.그래도 여기에 나오면서부터 내가 진짜를 살게 된 거에요.…우리를 보러 오는 사람들도 있잖아요.…어디 가서나 부끄러움 없이 있던 그대로 다 말합니다.그러니까 얼마나 시원하던지요.그렇게 말하다 보니까 마음도 시원해지고 시방은 조금 사람 사는 것 같이 살고 있습니다.”

계절을 넘나들며 비바람과 눈보라,뜨거운 볕을 함께 견디며 한 자리에서 열렸던 수요집회는 할머니들의 개별적 기억이 우리 모두의 기억이 되는 장소였다.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은 울고 웃었고,할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사람들은 함께 슬퍼하고 분노했다.그 수요집회가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어가는 걸 길원옥 할머니는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계실지, 하늘에 계신 할머니들은 또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계실지 가늠하기 어렵다.

얼마 전에 고인이 되신 김복동 할머니가 떠올랐다.할머니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리고,평생 일본의 사죄를 받고 싶어 하셨다.할머니는 고인이 되셨기에 아무 말씀도 하실 수 없지만,증언집을 펼치는 순간 할머니의 말들이 생기를 입고 되살아났다.열 다섯에 끌려가 스물 둘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는,그 고통을 전생의 업이라고 생각하시며 평생을 사셨다.그게 아니라면,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전생에서 옥황상제의 딸로 태어나 자식을 죽인 죄로 이 이생에서 끔찍한 벌을 받아야했다는 설명으로 겨우 이해되는 고통이었을 것이다.“이해할 길이 없었어.전생이 아니면,전생에 지은 죄가 아니면,내가 겪은 일들을.”(일본군위안부 김복동 증언집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29)

“내가 나를 찾으려고 하니까 큰 언니가 말렸어.조카들 생각해서라도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그래도 나를 찾고 싶었어.예순두 살에 나를 찾으려고 신고했어.신고하고 큰 언니가 발을 끊었어.우리 아버지,엄마 제사 지내주는 조카들까지.”(증언집,136) 제발 가만히 있으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준 건,광장으로 모여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그래서 할머니의 기억은 글로,그림으로,영상으로 남겨졌고 사람들은 할머니의 기억을 공유하며,같이 울고 웃었다.

고 김복동 할머니가 앉아계셨던 자리,할머니가 말씀하셨던 자리가 고성과 욕설,몸싸움이 벌어지는 살벌한 현장이 되어가는 걸 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주먹을 꼭 쥔 채 단정하게 앉아있는 소녀상은 말없이 온 몸으로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잘못된 것들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그런데 할머니들과 함께 했던 지난 삼십 년의 세월과 기억까지도 상처를 입고 있다.

다시 삼십 년이 지난 후,후인들은 할머니가 앉아계셨던 자리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그 기억이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시위라면,칼에 긁히고 돌에 찍힌 소녀상이 놓인 자리라면,할머니들은 또 다시 뼈아픈 눈물을 흘리실 것 같다.

강원도민일보를 응원해주세요
정론직필(正論直筆)로 보답하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